매팅리와 보치의 차이 기타

매팅리 (커쇼에게): 야, 안타는 없지만 제대로 맞는게 불안하거든. 이제 좀 쉬어.
커쇼: 감독이면 다야? 이래뵈도 에이스라고. 완투할 수 있어.
매팅리: 그런데, 아무래도 좀...
커쇼: 에이씨!
매팅리: (찍!) 알았어...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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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치 (마치에게): 야! 제대로 맞았잖아. 뭐하는거야?
마치: 그래봤자 싱글이라고요.
보치: 이 싱글때문에 재네들이 기살려 줄 수 있어! 내려가!
마치: 저, 한 명밖에 못 던졌는데...
보치: 지금 토다는 거냐?
마치: (찍!) 네....

외치(Oetzi)는 어떻게 죽었나?

숨어서 외치를 노리는 무리들




헉! 치명상을 입는 외치 (예전 이론대로라면)



얼마전 유럽 고고학계가 조금은 시끌시끌했다.

알프스에서 발견된 신석기인 '외치'의 진짜 사인(死因)을 밝혀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새로이 밝혀진 사실은 아니다. 과거에도 오스트리아 학자들은
머리 부상으로 인하여 죽었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러나  어깨에 박힌 화살이 동맥을 뚫어 과출혈로 죽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힘을 얻으면서 머리 손상 주장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제 학자들은 외치의 머리 부상이 직접적인 가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화살을 맞은 후 넘어지면서 생긴 것인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다.

물론 고고학자들의 노력을 폄하하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행한 작업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 있어 외치가 화살에 맞아 죽었는지 뇌손상으로 죽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화살에 죽었건 몽둥이로 죽었건 이는 신석기가 전반적으로
폭력적인 시대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 폭력은 드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상이었으며
이는 청동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국가와 문명의 발현이전에도 폭력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선사 인류 연구에서의
오류는 계속될 것이다.

이석기는 수구꼴통들과 마찬가지의 꼴통이다

이석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석기가 자주적이라고? 어떤 시절?

웃기지 마라. 이석기는 지난 시대의 이념을
붙잡고 있는 꼴통이다.

그는 가짜보수 수구꼴통들만큼이나 냉전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다만 좌우가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이면 물어보지도 않고 게거품무는 가짜보수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감상적인 북한론을 내세우는 이석기도 나을 것 하나 없다.

북한은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북한은 '다른 나라'이다.
그리고 북한은 적국이다.

민족공동체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대적인 태도를 풀지않는 적국에 대하여
일방적이고 감상적인 평화를 외치는 사람을
옹호할 이유는 없다. 

80년대식 올드주사파의 경직성과 꼴통성을
그대로 지니고있는 이석기같은 인물은 수구꼴통
들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해야한다.

전자오락기도 중요한 유물이다 기타

역사는 사건이 아니라 의미이다

 

최근에 미국의 고고학회의 Archaology잡지 인터넷 사이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전자오락(video game)'의 역사 초창기의 최대 사건이자

역시 비디오게임의 역사 최악의 실패사례로 거론되는 미국 Atari사의 ‘E.T' 출시...

 

스필버그 이 양반까지 나서서 히트친다며 큰 돈들여 출시했으나...폭망...

결국 아타리사는 막대한 손해 무릅쓰고 Atari 2600형 기계와 카트리지를 뉴멕시코

Alamogordo의 매립지에 모두 덤프...

 

그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후 아타리사의 흥망을 다룬 Atari:Game Over이라는

다큐의 제작을 맡은 한 회사가 수 명의 고고학자로 팀을 구성하여

Alamogordo 매립지 발굴...

 






고고학자들은 아타리 게임을 하면서 자라난 세대였고

발굴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그 당시에 버려진 카트리지와

하드웨어 찾아냄.

 

이미 상당수의 기계와 카트리지가 보존작업을 마치고

미국 각지의 기술 박물관과 전시관행.

 

물론 잡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발굴소식을 듣고

쓸데없는 짓이라며 비아냥...그깟 게임기들이 무슨 가치가 있냐며...

 

그러나 본인은 그 보수적인 고고학자들이

이해가 안 감.

 

아타리 2600E.T게임의 폭망은 현대 기술사, 그리고 전자오락

마케팅의 역사에서 가치가 막대함.

 

본인이 생각하게 역사란 것은 고대이건 근세이건

최근이건 기간에 관계없이 모두 역사임.

 

어떤 유물이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나 사건 - 이 경우에는

1980년 초의 전자오락 열풍 - 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치가 있다면 발굴은 물론이고 그 보존과 관리까지도

당연하다고 생각함...

 

역사적인 현상의 가치나 위상은 당대와 후세에 미치는 영향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이지...그것이 얼마나 되었느냐, 또는 그것이 어르신들이

하찮게 여기던 오락기기였냐라는 것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됨.

 

오락기기건, 비파형 동검이건...상관없음.


역사는 역사임...



http://www.archaeology.org/issues/139-1407/trenches/2189-new-mexico-atari-dump-site-excavation

제국과 변경과 변경민 전쟁과 사회


‘변경(邊境)’과 변경민(邊境民), 또는 frontiersmen들은 문명국가들의 팽창/정복의 역사에서 중요하고도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미국 고고학회(American Archeological Institute)에서 펴내는 월간지 ‘Archeology Magazine’의 최신호(2014년 7/8월호)에는 미국 뉴욕주에서 7년전쟁(Seven Years’ War) 당시의 한 요새를 발굴하는 과정을 기록한 기사가 실려있다. 참고로 7년전쟁은 북미에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라 불리는데 북미와 인도의 패권을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격돌한 전쟁에 북미 식민지인들과 북미 원주민들이 참여한 전쟁이다.


북미에서의 7년 전쟁에서는 소위 제국의 변경과 변경민들의 존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잉글랜드계의 변경민들은 잉글랜드군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워싱턴으로 비롯하여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활약하게 되는 인사들의 상당수가 이 전쟁에서 경험을 쌓았다.


변경과 변경민들이 특수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변경과 변경민들은 ‘문명과 야만’ 그 어 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근현대 이전의 국경개념이다. 현대에는 국가간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하여주는 선(線)개념의 국경선(borderline)이 있다. 그러나 정치적 경계선인 ‘국경’은 인류사에서 지극히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다.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전, 현대적 의미의 국경선이란 존재가 불분명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소위 문명권과 ‘야만세계’간의 경계는 일종의 거대한 연속체(continuum)로서 존재한다. 명확한 선이 아닌 넓은 지역이나 구역(zone)의 형태인 것이다. 이 때문에 변경에서의 문명과 야만의 형태는 중심으로부터의 원근(遠近)에 따라 역시 뒤섞인 상태로, 스펙트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변경은 제국이 제국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수한 지역이다. ‘제국’이란 개념 자체가 바필드(Thomas Barfield)에 의하면 ‘먼 거리까지 중앙의 권력을 투사하기 위하여 생겨난 정치체’이다. 이개 지역의 추장이나 왕이 해결하지 못하는 광역지배의 문제를 정치적 구조의 개혁을 통하여 하여 광역지배체제를 이룬, 국가형성과 진화(State formation and evolution)과정의 정점에 있는 정치체이다.


변경은 중앙으로부터 멀기 때문에 행정과 치안이 잘 되지 않는다. 
중앙정부가 행정과 치안을 유지하려 해도 그때뿐이며 간헐적으로 겨우겨우 유지된다.


문화가 다른 집단이 섞여있는 변경에서는 당연히 분쟁과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치안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변경지역은 반영구적인 ‘저강도 분쟁(Low intensity warfare)’의 상태로 유지된다. 살인, 강도질, 부족간 싸움, 범죄집단에 의한 갈취행위, 개인적 원한에 의한 암살, 그리고 각종 폭력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즉 폭력이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변경이란 곳이다.


치안이 불안하니 변경민들은 자신들과 가족들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 변경에는
뜨내기들이 많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 변경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지극히 고립적이고 개인적이다. 안전과 안위에 대단히 민감하다. 개인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법이나 행정적인 권위에 얽메이는 것을 못견뎌한다. 그리고 폭력에 늘상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싸움을 잘한다.


중앙의 행정력이 잘 유지되지 않는 변경의 주민들은 현실적으로 제국민이나 신민으로 살 수 없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변경에 사는 하나의 ‘부족’이 된다. 즉 생활방식이 부족민들과 그리 다르지 않고 싸움도 문명국의 정규전이 아니라 부족민들의 ‘게릴라식’ 전투를 하며 부족회의와 모습이 다르지 않은 ‘부락회의’에서 공동체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워낙 개인적이고 고립적이고 까다롭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본국’의 위정자들은 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겨 실질적으로 지배를 포기하였다. 평상시 본국의 ‘지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본국의 기본적인 태도는 변경민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아주 가끔씩 약간의 세금을 걷고 충성을 다짐받는 것을 제외하고 중앙의 귀족들과 관리들이 변경의 촌놈들을 신경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문명국이 변경을 넘어 ‘야만’의 지역으로 들어갈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문명국이 비록 무기나 병력에 있어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기후와 지리에 익숙치 않아 초기 식민지 시절의 어떤 잉글랜드인이 말한 ‘숨어서 하는 전쟁’, 즉 게릴라전을 하는 부족민들에게 패하는 일이 많았다. ‘정정당당한 싸움’을 하기를 거부하는 부족들에게 정규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변경민이 제국에게 중요해지는 때는 바로 이런 때였다. 변경민들은 변경지역의 환경과 지형에 익숙하고 평소에도 싸움에 익숙했으며 게릴라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부족민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제국은 변경민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제국(문명국)들은 변경민들을 끌어들여 변경 부족들의 전술을 채택한 연후에야 비로소 부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7년전쟁과 관련하여 제국과 변경민의 합작과정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예를 들어 모히칸족의 최후)에 대단히 현실적으로 잘 묘사되어있다.


그런데 문제는 변경민들의 힘을 빌어 부족들을 제압하게 되면 본국에서는 변경민들이 사는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직접적이고 강력한 통치를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던 변경민들은 기본적으로 공식적인 행정과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이들 변경민이 본국의 권위와 통치행위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결국 이는 본국과 변경민들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은 심심찮게 본국또는 제국과 변경민들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례는 세계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에 강(羌)족과 살고 있던 서북지역 변경민들이 삼국의 각축전에 끼어든 일이 있다. 7년 전쟁이후 영국이 북미 식민지에 대해서 통치를 강화하려하자 식민지민들은 반발하였고 결국 이는 미국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남아프리카에서도 농업과 목축을 겸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던 보어인들에게 영국이 식민지 통치를 강요하면서 보어인들이 반발하여 1차 영-보어 전쟁이 발생한다.


그러나 문명국의 기술에다 부족민 같은 전술을 구사하는 변경민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미국독립전쟁 당시 버몬트와 캐롤라이나 등지에서 잉글랜드군은 ‘도망가는 전투’와 정규전을 병행하는 식민지민들에게 고전하다가 결국 전쟁에 패배하였고 1차 보어 전쟁에서도 보어인들에게 고전을 하다가 패하고 보어 공화국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차 보어전쟁에서 50만의 보어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무려 45만의 대군을 부려놓은 뒤에야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따라서 최근 뉴욕주에서와 같은 유적이 나올 때, ‘미국’과 같은 일국사(一國史)의 관점에서 연구하기 보다는 본국-변경간의 역학관계의 관점에서 재조명을 해볼 때 역사연구가 보다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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