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파도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전투와 장군













서로마 제국이 서기 476년에 멸망한 후 서유럽은 각 부족의 족장들과 작은 왕국의 왕들이 서로 싸우는 혼란기로 접어들었지만 로마제국의 동부는 ‘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명맥을 이어간다. 세계사속에서 비잔틴 제국이라 불리운 동로마는 지금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에 도읍하여 향후 거의 1000년간 유지된다.

 

서기 6세기경, 동로마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는 고대 그리스이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원(學院)인 리케움을 폐쇄한다. 그리스도교의 정통이자 종주국에서 이단인 그리스 철학을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기독교를 승인한 이래, 동로마의 황제는 한 나라의 임금인 동시에 교회의 수장(首長)이었다. 황제의 명령은 곧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신의 명령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동시에 로마제국의 재건(再建)이라는 세속적인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 다행히 명장(名將)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등장하여 야만족들에게 점거되고 있던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섬,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에스파냐 남부를 회복한다. 지금의 이란을 차지하고 있던 동쪽의 강대한 나라인 사산조(朝) 페르시아와는 백중세로 싸우고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임진왜란중 선조가 의심병이 지나쳐 명장과 용장들을 핍박하였듯이 유스티니아누스는 충직한 군인인 벨리사리우스가 혹시라도 군부를 등에 업고 황위를 노리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새로이 수복된 영토에 많은 군병을 주둔시키기 않았고 새로이 수복된 영토는 유스티니아누스와 벨리사리우스가 죽은 후 이슬람의 침공으로 동로마로부터 이탈한다.

 

이슬람의 흥기와 동로마의 위기

동로마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모하메드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토속종교를 모두 멸살하고 아라비아의 유목부족들을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기치아래 통일한다. 이슬람의 주요 교리중 하나는 이 세상에 이슬람을 믿는 땅을 최대한 넓혀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전쟁을 그들은 ‘지하드(聖戰)’이라고 칭했다. 마침 모하메드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들이 성전을 계승하여 라시둔조(朝)를 세우고 칼릴-이븐 알 왈리드라는 걸출한 장군의 지휘하에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며 동로마군도 여러차례 이슬람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 지방을 잃고 만다.

 

라시둔조는 움마이야조로 바뀌었고 동로마는 지금의 터키지방을 제외하고 동로마의 모든 영토를 잃은 것도 모자라 674년에는 이슬람군에게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공격받기에 이른다. 공성무기가 부족한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높은 성벽을 부술 수가 없었지만 대군이 포위당한 동로마는 일대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몇해동안 몹시 추운 겨울이 찾아와 따뜻한 지방 출신의 이슬람군 상당수가 동사(凍死)하였고 이슬람군의 침략을 피하여 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온 피난민중에 칼리니코스라는 발명가가 있었다. 칼리니코스는 동로마군에게 ‘그리스의 불(Greek Fire)'로 알려진 액체화약의 비밀을 알려준다. 동로마 해군은 이 화약을 사용하여 677년에 포위군을 보급하러 오던 이슬람군 함대를 마르마라해(海)에서 크게 무찌른다. 보급을 받을 수 없게된 이슬람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고 이슬람군은 향후 30년동안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오지 않았다. 대신 이 기간 동안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에스파냐를 침공하여 점령한다.

 

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그러나 이슬람군은 30년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당한 참담한 패배를 잊지 않았다. 이슬람군은 기독교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이단’인 기독교를 멸망시키겠다고 공언하며 서기 717년, 다시 10만이 넘는 대군을 모아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아래로 쳐들어왔다. 일단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자마자 바로 공격을 시도해보았지만 5세기 전반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건립되고 678년의 침공이후 더욱 높아지고 두꺼워진 콘스탄티노플의 2중방벽은 침입자들의 공격을 수월하게 격퇴하였다. 결국 이슬람군은 장기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군은 일단 성벽앞에 긴 참호를 파서 수비군이 반격을 하기 어렵게 만든 다음 함대를 마르마라해에서 흑해방향으로 보냈다. 만약 흑해쪽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한다면 동로마는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나오는 밀을 공급받을 수 없어 식량난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에 동로마로서는 뜻밖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

 

흑해로 향하던 이슬람 함대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에서 흑해로 빠지는 해협)에서 갑자기 급류에 휘말렸다. 이를 본 동로마황제 레오 3세는 즉시 황금곶(콘스탄티노플 옆의 좁은 물길, 동로마 함대의 기지로 쓰였다)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쇠사슬을 풀게한 다음 함대를 발진시켜 이슬람 함대롤 공격하였다. 그리스의 불을 실은 동로마의 군선들이 일제히 방사기를 통하여 불공격을 퍼부었고 이슬람의 대함대는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이는 이슬람군의 사령관인 술래이만이 거느린 함대의 반이었지만 그는 마르마라해의 예측불가능한 물살과 동로마 함대에 다시 한 번 도전했다가는 함대 전부를 잃을 것 같아 흑해쪽으로의 진출을 포기한다. 이로서 동로마는 계속하여 크림반도의 무역기지들로부터 식량을 받을 수 있어 장기전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게 된다.

 

이슬람군은 함대의 반을 잃은 것도 모자라 곧이어 움마이야조의 칼리프(이슬람의 군왕 이름; 교황과 비슷한 개념)인 술래이만(사령관 술래이만과는 동명이인이다)이 위장병으로 사망하고, 덕망은 높으나 정치력이나 군사적인 지도력이 모자란 우마르 2세라는 인물이 칼리프가 된다. 지도자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이슬람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고 말 그대로 설상가상으로 717년의 겨울은 몹시 혹독하였다. 이슬람군이 마지막으로 쳐들어왔던 670년대보다도 더한 엄동설한이 몰아쳤고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내린 눈이 겨울 3개월 내내 녹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함대가 대파당한후 보급상황까지 좋지 않아 아리비아와 이집트 출신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떼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이슬람군은 718년 봄에 다시 한 번 주도권을 쥐려고 하였고 곡창지대인 이집트에서 엄청난 양의 식량과 함께 5만의 증원군이 도착한다. 함대의 일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동로마 해군 몰래 통과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슬람 함대는 다시 한 번 흑해쪽에서 콘스탄티노플 봉쇄를 시작하였다. 이때 동원된 이슬람 함대의 선원 대부분은 이집트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무슬림이 아니라 기독교 초창기부터 이집트에 있었던 콥트교회의 신자들이었다. 콥트 기독교회는 동방교회중의 하나로서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가 세웠다고 알려져있는데 이슬람 지배하에서도 교회를 유지하였다. 이집트 함대선원 일부가 탈출하여 레오 3세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집트 함대를 공격하면 그들은 기독교도들과 싸우지 않고 그대로 항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레오 3세는 즉시 공격에 나섰고 그리스의 불로 흑해의 이슬람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기독교도 선원들은 지체없이 동로마쪽으로 항복하였고, 레오 3세는 멈추지않고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의 대안(對岸)에 상륙시켜 그곳에 있던 이슬람 봉쇄부대를 대파한다. 이로서 이슬람군의 봉쇄작전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레오 3세는 북쪽의 이민족인 불가르족(불가리아인들의 조상)에게 다가가 만약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 불가르족이 다음 목표가 된다고 설득하였다. 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욕심이 있었던 불가르족의 수장인 테르벨은 동로마군의 사정도 알아볼 겸 레오 3세의 말에 동의한다. 레오 3세에게 설득된 불가르족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던 이슬람군의 후방을 들이쳤고 이슬람군은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하며 무려 22000명이 전투에서 죽고 만다. 이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족이 같은 기독교도인 동로마를 돕기위하여 대군을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동로마의 막강해군과 불가르족의 기병사이에서 고전하고 있던 이슬람군은 프랑크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땅바닥을 헤맸다. 이에 칼리프 우마르 2세는 더 이상의 공격은 더 큰 손실만 볼 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718년 8월에 이슬람군의 철수를 명하였다. 이로서 2차에 걸친 이슬람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결론

아라비아에서 뛰쳐나와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심지어는 에스파냐까지 휩쓸면서 무적을 자랑하던 이슬람군에게 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처음으로 겪는 대패였다. 이전에도 일시적인 패배는 있었지만 일개 전투차원에서 패배였다. 그러나 온 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거국적인 원정이 이렇게 참담한 패배로 끝나기는 처음이었다.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위하여 총 21만의 대군을 동원했다고 알려졌는데, 이중에 고향으로 돌아간 군사가 3만에 지나지 않았다. 2000척이 넘던 이슬람 함대중 5대만이 이슬람의 항구로 귀항하였다. 우리나라역사로 치자면 수양제의 수나라 군대가 살수대첩에서 당한 대패와 동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패배로 움마이야 왕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동로마가 승리한 것은 교회의 역사, 그리고 향후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만약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졌다면 일단 거의 지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슬람의 대군을 막을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칸반도는 물론 러시아 남부, 보헤미아(체코), 헝가리, 폴란드, 독일의 대부분이 이슬람군의 침략에 노출되었을 것이고 이슬람화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때는 후일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로마 카톨릭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독교회의 실질적인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등 다른 교회 중심지들이 모두 이슬람의 영토로 들어간 상태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이슬람의 승리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로마 교황의 권위가 미미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기독교회의 최고수장인 상태에서 기독교회는 더 많은 분파로 쪼개어 졌을 것이고 유럽을 지배하는 가톨릭은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이 유럽을 지배하고 세계종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콘스탄티노플에서 승리한 이슬람군은 유럽을 서쪽(에스파냐)와 동쪽(발칸, 동유럽)에서 조였을 것이고 강력한 프랑크족도 위기를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슬람군을 대파(大破)함으로서 이슬람은 유럽이 아닌 중동인들의 종교로 남게 되었다. 비록 1453년에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만 이미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유럽을 지킬만한 힘을 가지게 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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